격변이 낳은 사람들의 끝나지 않는 피난길

1. 영화가 이야기하고 싶은 ‘삼포 가는 길’
영화 ‘삼포 가는 길’의 이만희 감독은 45세가 되던 해에 개봉을 보지 못하고 사망했다. 그리고 영화는 소설과 달리 개봉 일주일을 넘기지 못한 채 내려졌다. 영화 ‘삼포 가는 길’은 소설의 주요 구성 즉, 인물, 사건, 배경은 유사하게 따랐다. 그러나 정 씨에게 10년 정도의 세월과 그리운 딸의 존재를 더하고, 노영달에게도 사랑, 이별, 약장수 등의 굴곡진 과거를 부여했다. 그리고 소설과의 결정적 차이는 마지막 인물 행방의 노출이다. 소설에서는 정 씨가 기차를 탔는지 타지 않았는지 알 수 없지만, 영화에서는 세 사람 모두 어딘가에 다다르는 행방을 노출한다. 백화는 지명은 알 수 없으나, 어느 기차역에 도착하였고, 노영달은 자신의 힘을 알아봐 주는 이들과 새로운 공사판으로 합류하였다. 그리고 정 씨는 삼포 가는 버스 안에서 신작로 다리를 건넌다. 소설과는 다른 영화의 이런 내용을 두고 비판이 있다. 바로 소설에서 이야기했던 길 위 떠돌이 사람들의 애환과 산업화로 인해 고향을 잃어가는 그들의 더 힘겨운 삶에 대한 고찰이 배제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영화 속 인물들의 목적지는 목적지가 아니라 또 다른 길이라고 느껴졌다. 일제 강점기 또는 6.25 사변 전후 출생했을 인물들은 20~40년 동안의 삶 속에서 해방과 휴전을 맞이했다. 하지만 그들에게 실존하는 삶 또는 실존할 앞으로의 삶은 또 다른 일제 강점기이고 6.25 전쟁이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영화 속 삼포는 인물들의 최종 목적지가 아니라 현재의 억압과 고통을 피해 가는 길 위의 또 다른 피난 처일뿐이다. 피난처는 언젠가는 또 떠나야 하는 삶의 또 다른 전쟁터인 것이다. 소설이 주는 여운보다 영화의 여운이 덜할 수 있겠지만, 나는 영화의 이러한 설정 변경으로 격변의 시기에 태어난 이들의 숙명적 삶이 아직도 격변에서 벗어나지 못한 진행형의 더욱 고달픔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듯했다. 인물들이 소설 속에서 머물렀던 기차역이나 영화 속에서 각자가 향한 곳이나 결국은 그들에게 전쟁터이기는 매 한 가지인 것이다. 그리고 떠오르는 의문들... ‘출생과 성장과정에서 식민과 전쟁을 겪은 청년들에게 70년대는 왜 전쟁터가 되었을까?’, ‘이 전쟁터에서 이들은 누구를 위한 전쟁을 하고 있는가?’, 마지막으로 ‘이들이 진정 바랐던 것은 무엇일까?’. 아마도 감독은 영화를 보는 그 시대 사람들이 이 질문의 답을 알게 될 때 비로소 시대의 억압과 삶의 전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영화 삼포 가는 길은 이만희 감독이 사람들에게 주는 의미 있는 유작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2. 영화 삼포 가는 길이 보여주는 70년대 한국사회
영화 삼포 가는 길을 보면서 당시 군인 장교였던 나의 아버지께서 청춘의 꿈을 펼치고 나를 낳아 공주처럼 키우셨던 70년대의 모습이 정말 저랬을까 싶은 의문이 들었다. 또한 비슷한 시기에 나온 영화들의 색채감과 이미지와는 너무나 다른 느낌이었다. 시골스러움, 스산함, 무채색 같은 화면 등은 50~60년대를 연상시켰다. 그러나 잠시 후 다시 드는 생각은 이때의 한국사회는 군사정권 등과 관련된 주류들의 발전하는 사회와 그 뒤로 가려져 아직도 50년대같이 과거에 있는 숨겨진 일반 개인의 사회로 뚜렷이 구분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70년대 개인들의 가려진 한국 사회는 국가의 성장을 위한 산업화/도시화 속에 보호받지 못하는 개인들의 상실의 시대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영화는 그러한 현실을 그대로 잘 보여준다. 영화 속 나오는 많은 이야기와 장면 그리고 인물들로부터 그 시대 개인과 그들의 사회를 엿볼 수 있다.
1) 국가의 성장을 위한 산업화/도시화와의 전쟁
70년대 개인들은 도시화와 산업화로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외형적 모습과 TV의 보급 등 문화적 혜택의 폭이 넓어지는 등 이전 시대 가질 수 없었던 물질적 풍요를 목격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개인에게 그것들은 사치일 뿐이다. 정 씨, 노영달 그리고 백화는 고단한 삶 속에 눈 쌓인 재를 넘고 논밭을 걸어 기차역까지 간다. 공사장을 떠돌아다니며 산업화의 부스러기를 주워 먹는 그들은 산업화의 소모품일 뿐이다. 미성숙한 국가에게 정체성과 체제의 확립을 위한 산업화와 도시화는 국민을 소모품으로 쓰더라도 반드시 치러야 할 전쟁 같은 것이다. 국가와 자본은 소모품에게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다. 하루하루 먹고 살 정도의 대가는 소모품인 삶을 벗어날 수 없도록 더욱 억압한다. 산업화의 부스러기를 외면하고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는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보다 더 어려워 보인다. 공교롭게도 72년 유신시대의 개막은 일제 강점기와 다를 바 없는 억압의 시대일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매일매일 노동과 전쟁을 치른다. 그 전쟁은 스스로 선택했다기보다는 그 시대 청년들의 숙명적인 삶인 것이다. 이러한 억압과 전쟁으로부터 그들은 왜 벗어나지 못할까? 정권이 만든 프레임을 통해 보여 지는 산업화의 성공모델과 타인의 삶은 그들 자신도 어쩌면 가능할 것이라는 달콤한 꿈을 꾸게 하기 때문 일 것이다. 그래서 이 시대 청년들은 전장의 보병처럼 그들이 존재하는 삶 자체가 전쟁이다. 내일이 올지 생각하지 못하고 오늘, 지금을 살기 위해 처절하게 몸부림친다. 노영달이 밥값을 아끼기 위해 식당 안주인과의 부적절한 관계를 선택했던 것처럼, 그것이 잘못된 길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치열한 전쟁터에서는 오로지 살아남는 것 그것만이 답인 시대였기 때문이다.
2) 전쟁터 같은 삶에서 보호받지 못하는 개인들의 국가를 위한 희생
기댈 사람도, 든든한 밑천도, 그려볼 희망도 없는 이들, 단지 지금 이 순간 살아있음만이 주어진 이들은 누구를 위해 그 거친 길을 홀로 걸어가는 것일까? 허벅지까지 빠지는 눈길 위에 홀로 서있는 허수아비를 보며 자신의 인생을 투영하는 노영달의 삶, 길 위에 언제나 있었던 것 같은 정 씨의 자연스러운 떠돌이 삶, 강한 척, 센 척 억지스러움으로 자신을 지켜내고 있는 백화의 내가 아닌 삶에서 그들은 왜 보호받지 못하고 있는가? 태어나면서부터 식민의 억압과 전쟁의 상처를 받았던 그들은 치유받지 못한 채 또 다른 전쟁터 또 다른 억압에 노출되어 병든 삶을 살아간다. 자신이 팔던 쥐약을 먹고 자살한 연인의 기억은 노영달에게 깊고 진실된 또 다른 사랑을 허락하지 못하는 정신적 결함을 갖게 했다. 남자들에게 몸을 팔며 술집 주인에게 억압당하는 백화는 온통 자기 방어뿐이다. 산업화/도시화가 되어가지만 여전히 이 사회는 여성에게 인간다운 일자리를 주지 않는다. 성을 소비하는 주체인 남성들조차도 화냥년이라 욕한다. 또한 여성인 술집 주인도 백화를 술 팔고 몸 파는 술집의 도구로 볼뿐이다. 그리고 너무나 놀랍게도 또 다른 백화들이 몸을 파는 술집이 마을마다 있다. 이것이 그 시대의 모습이다. 도시화는 익명의 대중을 만들고, 그들은 각자 고립된 삶 속에서 시민으로서의 권리나 인간다운 삶의 질을 상실했다. 그리고 국가는 이러한 이들의 삶을 돈 몇 푼에 사들이고, 그들의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 병리 상태를 묵인했다. 백화와 노영달은 서로를 쓰레기라, 화냥년이라 욕한다. 하지만, 이들도 안다. 그들 자신 때문에 쓰레기가 되고, 화냥년이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경제발전이라는 국가의 목적 있는 명분 아래 개인들의 병리적 상황은 묵과되었던 시절이었다. 이 순간 잠시 안타까운 생각이 스쳐간다. 70년대를 살았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박정희 대통령이 우리를 먹고살게 해 줬어”라고 말한다. ‘어휴... 바보같이... 자신들이 박정희를 먹여 살렸던 건데... “. 여왕개미와 개미왕국을 위해 바삐 움직이는 일개미들처럼 일개미 자신의 삶은 없는 곳, 70년대 한국사회가 이와 같을 것 같다.
3) 머물 곳 없고, 가진 것 없고, 자신이 상실된 흔적 없는 삶 속에서 개인들의 희망
70년대 백화가 머물렀고, 노영달이 지낸 공사판은 나의 아버지가 머물렀던 도시와는 사뭇 다른 공간이었던 것 같다. 백화는 자신이 한때 대단한 작부였다고 이야기하며 자신이 거쳐 온 곳 즉, 당시 도시화의 대표적인 곳들을 이야기한다. 백화가 이야기하는 곳들은 백화, 노영달, 정 씨 모두에게 진입하고 싶지만 진입하지 못하는 ’ 희망의 성지’라는 느낌을 받는다. 참 아이러니 하지만 영화에서 이들은 고향을 그리워하고, 소설에서는 실향민인 작가 자신이 갖고 있는 고향의 상실감을 보여준다. 이것을 합쳐 생각해 보면, 결국 이들에게 도시는 진입할 수 없는 주류들의 것이고, 고향은 이미 그들이 태어날 적부터 아니면 태어나기 전부터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30~50년대에 태어난 격변이 낳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머물 곳이 처음부터 없었다. 소모품의 삶에서 경제적 자본을 축적한다는 것은 더더욱 어렵다. 머물 곳이 없어 하루하루 길 위를 걸어가는 삶은 그들을 이 사회에서 지워가고 있다. 그러나 그런 삶 속에서도 백화는 노영달과의 달콤한 살림살이를 원했다. 정 씨는 삼포(森浦)라는 지명이 알려주듯 우거진 수풀과 개울이 흐르는 곳에서 18살 딸을 만나 정착하며 살기 원했다. 그리고 노영달은 큰돈을 벌어 자신의 사람을 잃지 않아도 되는 삶을 원한 건지 모른다. 그래서 그들이 진정으로 바랐던 희망 ’ 삼포‘는 어디가 아닌 무엇인지 물어봐야 할 것이다. 결국 이들 모두는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과 상대를 느끼며 각자가 생각하는 인간다운 삶을 사는 것이 희망이었을 것이다. 별거 없어 보이는 참 소박한 희망이지만, 지금 2018년에 살고 있는 우리는 이런 별거 없는 삶이 실현되고 있는지 생각해 볼 문제다.
3. 비판적 수용자의 길
정권의 프레임에 맞는 다중적인 검열 아래에서 삼포 가는 길은 소설을 쓴 황석영 작가나 영화를 찍은 이만희 감독이나 모두 자신의 문예작품을 소비해 줄 수용자들에게 시대정신의 변화를 요구했다고 생각한다. 정 씨는 큰집 경력이 있는 떠돌이 노동자로부터, 노영달은 굴곡진 삶과 슬픈 관계의 기억으로부터, 백화는 술집으로부터 해방되고자 한다. 그러나 백화가 기웃거리는 곳은 읍내의 또 다른 술집이고, 영달이 선택한 것은 새로운 사람들과의 일자리이며, 정 씨는 변해버린 고향의 모습에 눈동자가 흔들린다. 결국 이들은 억압받는 시대의 삶 속으로 스스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이만희 감독은 영화를 통해 두 가지를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첫째는 개인의 삶은 전쟁 같았을 것이고, 그들은 그 전쟁을 대개인 자신이 아닌 국가를 위해 그리고 주류들을 위해 치렀으며, 하루하루 전장에서 개인들은 자신들을 위해 가져야 하는 희망을 상실한 것임을 깨닫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시대 정권뿐만이 아니라 각각의 개인들도 지배적인 잘못된 시대정신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이 희망하는 인간다운 삶을 살고자 하는 새로운 시대정신을 가지라고 이야기한 것이다. 이것은 곧 대중문화를 통한 비판적 수용자로서의 시각을 넓힐 것에 대한 강한 요구이다.
영화 삼포 가는 길을 글의 대상으로 선택한 이유는 단순했다. 그냥 내가 태어난 해에 개봉된 영화를 선택하자는 취지였다. 영화를 보는 내내 아버지가 나에게 들려주었던 내영유아기 때와는 참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68년 언니를 낳고 이듬해부터 통역장교로 진짜 전쟁인 월남전을 오랜 기간 참전하셨던 아버지에게 나는 7년 만에 다시 태어난 둘째 딸이었다. 이만희가 영화를 만들었던 그 시절의 아버지와 나는 영화 속 인물들과는 다른 공간, 다른 삶을 살았지만, 그것 또한 아버지의 전쟁 참여 덕이라는 것을 안다. 그리고 75년에 태어나 2018년 이만희 정도의 나이가 된 나는 어떤 사회에서 어떤 개인으로 살고 있는지 생각하게 된다. 지금 우리 사회의 약자는 누구이며, 이들은 보호받고 있나? 그리고 나는 한 개인으로서 사회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며, 시대가 아닌 나와 우리가 중심인 삶을 살고 있는가? 를 되짚어보게 한다. 그리고 내가 숨 쉬고 사는 동안 이 질문은 계속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덧붙여 ’ 2018년 이제는 70대가 되어있을 우리 사회의 정 씨들, 노영달들, 백화들은 지금도 70년대 정권의 프레임 속에 갇혀 살고 있다’라는 안타까움이 남는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60~70년대의 영화를 보며 당시의 한국사회를 알아서 그것이 재미 말고 무엇을 더 주겠냐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지만, 평생을 고된 피난길의 삶을 살고 있고, 집집마다 한 둘 정도는 함께하고 있을 정 씨들, 노영달들, 백화들의 고집스러운 삶을 이해하는 시간으로도 충분했다. 시어머니의 박근혜 사랑과 아버지의 전쟁에 대한 두려움은 그들이 아직도 격변의 피난길 위에서 병리적인 삶을 살고 있다는 증거이며, 치유받지 못한 그들의 삶을 이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참고문헌>
황석영. 『객지 한씨연대기 삼포 가는 길 섬섬옥수 몰개월의 새(20세기 한국고설 25)』, 창비, 2005.
이규일, 「삼포 가는 길의 인물들에 나타난 인식의 변화 과정 연구 -대화 상황을 중심으로-」, 『문예시학 18권』 241.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