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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전우치, 우리들의 진정한 로망은 무엇인가?

 

얼마 전 최동훈 감독의 신작 외계인을 봤다. 그리고 나는 영화를 보던 중간에 전우치를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마주였을지, 아니면 그가 추구하는 영화의 방향이 전우치였을지 모를 일이지만, 대사에서도 장면에서도 류준열을 볼 때마다 강동원의 전우치가 떠오르는 건 내 책임이 아니라 감독책임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 전우치를 써보려 한다. 

 

 

존재의 가치! 진정한 우리들의 로망이 될 수 있을까?

영화 전우치

 

1. 고전에서 영화로의 재구성이 갖는 의미

 

  영화 <전우치>는 고전소설 <전우치전>을 기반으로 한다. 이처럼 기존에 우리에게 익숙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재구성은 친숙함이 있으면서도 새로움이 있는 이야기라는 딜레마를 극복할 수 있도록 해준다. 또한 영화를 제작하는 입장에서 기초가 되는 이야기의 기본 뼈대가 있다는 것은 많은 수고를 덜게 한다. 고전소설의 주인공 전우치의 행적과 그 외 다양한 설화들을 바탕으로 영화 <전우치>는 재구성되었다. 아마도 영화의 재구성은 감독이라면 누구나 흥행을 담보로 할 것이며, 그것은 관객이 원하는 친숙함과 새로움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선사하기 위한 방향으로 진행되었을 것이다. 영화가 재구성한 것은 크게 배경이 되는 시간과 공간, 이야기를 끌어갈 사건, 그리고 이야기의 중심이 될 인물이다. 먼저, 배경이 되는 시간과 공간의 재구성은 고전소설의 전우치가 살았던 조선시대와 관객이 살고 있는 현대사회를 이동하며 재구성되었다. 이 설정 속에서 관객인 나는 고전소설의 친숙한 전우치와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는 환경에서의 친숙함을 느낀다. 동시에 나는 내가 살고 있지 않는 조선시대와 전우치가 살아보지 못한 현대사회를 통해 새로움도 느끼게 된다. 이러한 구성 속에 영화는 조선시대와 현대사회의 모습을 반영하여 관객이 원하는 이야기를 보여주고자 한다. 시간과 공간의 설정은 고전소설이나 영화 모두에서 전우치는 사회문제를 해결하고 더 나은 미래에 대한 꿈을 보여준다. 또한 영화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사회의 모습 속에서 전우치가 무엇을 해결할지를 보여준다. 고전소설 <전우치전>에서 많은 이야기를 가져와 그대로 하나의 에피소드로 사용하기도 하였고, 또는 에피소드의 소재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또한 우리 사회의 현상이나 영화 제작 현장의 이야기를 영화 속의 영화, 현실 속의 꿈, 꿈속의 현실 등 시간과 공간을 오고 가는 속에 구성하여 컷의 변화나 스피드의 구현이 없이도 사건과 이야기를 통해 속도를 느낄 수 있다. 화담은 고전소설 속에서는 전우치의 스승이 되는 인물이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끝없는 욕망을 바라는 요괴로 나온다. 이처럼 영화는 인물을 다양한 시각에서 재구성하였다. 영화에 나오는 인물들은 모두 중복되는 지점이 없이, 각자의 역할이 명확하다. 그리고 인물의 재구성은 전우치 중심의 고전소설과는 달리 등장 빈도,, 역할 등에서 주연과 조연의 경계가 흐리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각기 달리 재구성된 인물들을 통해 무언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글에서는 배경이 되는 시간과 공간이나 사건의 재설정으로 알 수 있는 현재 사회 속의 우리의 삶과 전우치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해결하고 싶은지를 살펴보고, 인물의 재설정은 각 인물이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2. 위로 받아야만 하는 우리의 삶

 

   (1) 우리의 삶은 어떠한가?

 

 영화를 이야기하기에 앞서 1997년 IMF에서 출발해 2020여 년이 흐르기까지 한국사회 속의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에 대한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더 정확하게 질문한다면, 언제나 피지배계층으로 살아오고 있는 우리에게는 어떻게 살아왔는지가 아니라 우리는 무엇에 지배받으며 살아왔고, 그것이 우리에게 준 것은 무엇인지를 질문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무엇에 지배받았는지를 생각해보면 이명박 정권도, 박근혜 정권도 아닌, 우리는 신자유주의에 지배받으며 살아왔다고 볼 수 있다. 어쩌면 이명박 정권과 박근혜 정권 10년간의 행적은 신자유주의를 이용한 권력의 자기 배불리기라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신자유주의 그것이 우리에게 준 건은 불평등일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실물경제와 금융자본 사이의 불균형을 타개하기 위해 채택된 경제정책이지만, 결국 신자유주의는 금융자본을 이용한 기업의 이윤추구에 맥락이 있었고, 인플레이션이나 스태그플레이션과 같은 통화 위기 때마다 통화를 지속적으로 늘리게 하여 결국 우리 모두 거품 위를 걷게 되었다. 그리고 워싱턴 컨센서스는 우리를 비롯한 많은 개발도상국을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프로그램의 희생양으로 삼았으며, 그 열매는 결국 글로벌 기업들의 차지가 되었다. 우리나라도 1998년 이후 7년 동안 외국인 투자자들이 직접 회수한 이익이 70여 조원에 이른다고 한다. 그리고 영화가 개봉한 2000년대 후반 우리는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결과로 인해 망가진 실물경제와 불평등이라는 심각한 사회문제를 떠안았다. 망가진 실물경제의 피해자는 당연히 시민들이고, 그 피해를 어떻게 해서든 만회하기 위해 노력해보지만, 우리는 이미 불평등함이라는 늪에 빠져 있다. 그리고 그 늪에서 더욱 발버둥 치고 노력해도 결국은 '신자유주의가 만든 불평등 늪'에서 아래로 아래로 내려갈 뿐이다. 영화 속 표은대덕이 마성에 젖어 지상에 떨어진 후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처럼 우리도 그 늪의 진흙에 갇혀 서로를 뒤로하고 누구와 함께 살고 있는지, 그리고 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잊은 채 살고 있다. 우리 스스로가 그러한 고립과 개인화와 익명성을 만들어 가며 사는 것이 아니라, 바로 신자유주의와 불평등, 그리고 불평등의 열매를 먹고사는 엘리트들에 의해 만들어진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다.  

 

   (2) 저항과 위로

 

  영화가 개봉되는 즈음의 한국사회는 1997년 겪었던 IMF를 버텨온 지 10년 만에 다시 2007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인해 다시 한번 큰 타격을 입은 지 2년 뒤였다. 그리고 경제를 되살려 주길 바라는 국민의 선택으로 2008년 2월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하였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부도덕한 문제들과 함께 시민들의 가슴속에 숨겨져 있던 불씨를 꺼내게 하였다. 2008년 5월 미국산 소고기 수입을 반대하는 시민들이 촛불집회를 열었다. 이 집회에 참여한 시민들은 축제 분위기에서 함께 어울리고 즐기며 종전과 다른 형태의 시위를 했다. 또한 비폭력이고,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열린 시위였다. 이러한 형태의 시위가 되기 위해서는 참여자 모두가 평등한 위치에서 진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2008년 촛불집회는 우리사회의 시민들의 수준이 놀라울 정도로 높아졌다고 봐야 하는 큰 사건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민참여의 분위기가 무르익어 감에도 불구하고 이명박 정권에서의 권력 남용은 더욱 가속화되었고,, 이것은 결국 박근혜 정권으로 고스란히 전해졌으며, 그 결과 2016년 우리는 세계사에 남을 만한 촛불 혁명을 경험했다.

  흥행불패 감독 또는 쌍천만감독이라 불리는 최동훈 감독은 2009년 전우치를 상영하였다. 2004년 범죄의 재구성 상영 이후 전우치는 600만 관객을 동원하면서 본격적인 흥행의 신호를 알렸고, 최동훈 감독은 그 이후부터는 더 많은 관객을 동원하며 드디어 도둑들과 암살 두 영화 모두에서 1000만 관객을 동원했다. 그리고 그의 영화가 성공한 데는 '국민의 삶을 위로하는 서사'가 담겼다고 평가했다. 다시 전우치로 돌아와서 살펴보면 전우치는 실존인물이라고 평가받고 있다. 조선시대 중종 때의 인물로 기록되고 있다. 그 시기는 반복되었던 사화(士禍)로 인해 현실정치에 대한 지식인들의 실망감은 갈수록 커져갔다. 또한 백성들은 고통스러운 현실세계에서 힘들어했다.. 전우치는 조선시대 이러한 상황에서 그의 실제 행적과 신비한 도술 능력을 바탕으로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욕구를 반영하는 소설 속 주인공으로 다시 태어났다. 또한 이 시기에는 전우치전뿐만이 아니라, 도술적인 능력이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긴 책이나, 이지함 선생의 토정비결 등의 비결류 저술들 대부분이 이 시기의 작성되었다. 그리고 도가사상에 기초한 꿈과 희망이 있는 미래를 예언함으로써 당시 사람들을 위로하였다.

  전우치는 최동훈 감독 자신이 좋아하는 캐릭터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이 전우치를 통해 한국적 판타지를 만들고 싶었다고 했다. 우리 정서에 이질감이 없는 슈퍼히어로 전우치를 통해 불평등을 해결해 나가는 서사는 지금이나 조선시대나 우리를 위로해 준다. 특히나 영화에서 전우치가 500년을 훌쩍 넘겨 현대의 클럽에 가고, 인경과의 로맨스가 있고, 역경을 극복하며, 더하여 자본주의와 시대의 시스템을 도술로 초월해 버리는 장면을 재해석해 보면, 영화를 통해 현실세계를 반영하고, 좀 더 드라마틱하고, 로맨스가 있으며 더하여 벗어나고 싶은 그 시대의 이데올로기마저도 초월해 주는 위로의 과정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과정은 통쾌하고 시원함을 안겨준다. 또한 영화 속 전우치가 광고에 나오는 와인과 향수를 꺼내 마시는 장면에서는 강준만이 그의 저서 대중문화의 겉과 속에서 이야기한 ”모든 사회적 가치를 소비사회의 덕목화“ 하는 것을 과감히 무너뜨려 주는 듯했다. 이 장면 속 광고는 소비사회 그 자체다. 그리고 우리가 신자유주의와 불평등에 이어 소유적 실존 양식을 추구하며 끊임없이 탐욕하게 하고, 모든 타인에 대해서 적대감을 가지게 했다. 어쩌면 우리가 타계해야 할 대상물이 하나 더 늘어난 것인지 모르겠다. 그리고 미관말직 신선 셋이 영화 속에서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듯이 우리도 타계할 그것들을 스스로 할 수 없기에 아마도 그 대안으로 촛불이라는 새로운 힘을 구축한 것일지 모른다.

 

 

   (3) 저항의 저 끝에는 뭐가 있나요? (미래에 대한 희망과 꿈)

 

"저 끝에는 뭐가 있나요?"

"아... 바다가 있... "

"선비님도 바다가 처음이구나"

"거 뭐 바다가 처음이라기보다는 바다를 보면 나 자신을 어떻게 볼까? 나는 누구인가? 또 나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저도요. 춤추고 노래하고, 바느질도 안 해도 되고, 책도 안 읽고..."

 

   영화 <전우치>에서 표은대덕의 환생으로 나오는 여인이 전우치가 도술로 만든 바다를 보며 나눈 대화이다. 2시간 15분의 영화 속에서 어쩌면 가장 핵심적인 장면을 뽑으라면 나는 이 장면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 장면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우리의 이상향을 담은 미래를 예언하고, 인물들이 각자 가지고 있는 삶에 대한 생각을 보여준다. 전우치는 최고의 도사란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과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의문을 질문으로 던지고, 여인은 양반가의 며느리로서 지위를 소유하기 위해 살기보다는 행복하고 아름다운 인간다움이 묻어나는 삶을 희망한다. 그리고 그들이 희망하는 꿈은 현실이 되어 영화의 마지막과 연결된다. 결국 영화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진정 우리가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소비사회 속 우리 주변에 있는 것이라곤 소비함으로써 존재함을 아주 잠시나마 느끼게 하는 것들뿐이다. 그리고 소비를 위해 우리는 타인과의 경쟁을 짐승처럼 하고, 그 경쟁의 결과는 결국 혼자가 되는 것이다. 에리히 프롬은 그의 저서 사랑의 기술에서 '분리는 정녕 모든 불안의 원천이다'라고 말했다. 결국 신자유주의라는 체제는 우리에게 불평등, 무한한 소비를 부추기는 소유적 실존 양식과 그로 인한 관계로부터의 단절과 병리적인 불안을 주었는지 모른다. 이러한 현실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결국 우리가 바라는 것은 지금 우리를 짓누르고 있는 비뚤어진 이데올로기로부터 벗어나 평등하게 존재하며 인간과 인간이 서로 관계하는 가운데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아가고 그 살아감에 대한 보상을 누리며 사는 것 아닐까? 또 에리히 프롬은 그의 저서 소유냐 존재냐에서 “존재적 실존 양식의 전제조건은 ‘독립’, ‘자유’, 그리고 ‘비판적 이성’을 지니는 것이고, 그것들의 가장 본질적 특성은 능동성이다”라고 했다. 영화 속 여인이 양반의 허울을 던져버리고, 오롯이 자기 자신의 태어난 모습 그대로 탐욕 없이 다른 이들과 춤추고 노래하며 사는 삶, 즉, 존재적 실존 양식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삶이 아닐까 싶다. 어쩌면 영화의 주인공이 전우치 일지는 모르겠지만, 이야기의 주제를 던져주는 인물은 표은대덕이고, 그 주제는 표은대덕이 바라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영화가 개봉했던 앞뒤 몇 년간 있었던 촛불집회를 생각해 보면, 그것은 능동성을 바탕으로 독립과 자유 그리고 비판적 이성을 추구하기 위한 우리의 실천적 노력이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다.

 

 

3. 마음을 비운다는 건 나를 알아가는 것

 

   (1) 실재로서의 존재

 

   "화담은 악한 요괴다. 그리고 전우치는 선한 도사다."라고 생각하는가? 그럼 그렇게 구분할 때 우리는 무엇을 기준으로 구분 지을까? 인간이 품고 있는 마음? 아니다 결국은 겉으로 표현되고 나타나는 행동양식에 따라 ‘그는 선하고, 저이는 악하다’라고 평가하게 된다. 전우치에서도 우리가 판단하는 것은 미관말직 신선들이 판단했듯이 화담과 전우치의 행동양식으로 그들이 선한지 악한지 또는 의로운지 의롭지 않은지를 판단하게 된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내게 질문을 던진다면, 선과 악의 기준이 무엇인가? 그리고 자문자답하다면, 결국 인간은 선도 악도 아닌 자신의 이익을 추구했을 뿐이다. 그러나 관찰하는 인간의 주관적(또는 내재되어있는 통념적) 입장에서 그가 추구하는 이익이 선하다 판단되면 선한 것이고, 악하다 판단되면 악한 것이 되는 것이다. 인간이 추구하는 이익의 종류가 관찰자의 기준에서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결국 인간은 스스로 이익이라고 판단하는 것을 향해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익이란 것은 선한 것 또는 악한 것이 아니라 에리히 프롬이 이야기한 것과 같이 소유하기 위한 이익인지, 존재하기 위한 이익인지로 구분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렇게 본다면, 영화 속의 화담과 전우치는 관객이 악하고 선하다고 번역하여 받아들였을 뿐이지, 악하고 선한 자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이익을 추구했는지 구분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추구한 이익이 존재적 실존 양식에 기반한 것이라 하더라도, 실은 그것이 다른 이들과 나를 구별 짓기 위한 선택된 행위이거나, 또는 무언가를 얻기 위한 거짓된 것이었다면 그것은 가면과 실재하는 나는 서로 다르다. 그리고 우리 안에는 소유적 실존 양식에 기반한 것과 존재적 실존양식에 기반 한 것 모두 있다고 봐야 한다.. 그래서 어쩌면 영화 속 전우치와 화담은 우리 안에서 늘 싸우는 존재와 소유의 의식들 일지 모른다. 그리고 그 둘 이외에 등장하는 여러 인간 또는 인간이 아닌 것들이 보여주는 모습은 내 안에 살아가고 있는 여러 인격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이러한 내 안의 인격을 찾아내 가면을 벗어버리는 것 그것이 마음을 비우는 과정이지 않을까? 그리고 그 과정을 거칠 때 우리는 점차 성장해 갈 것이라고 본다.

 

   (2) 영화 속 등장인물이 말해주는 내속의 나

 

  영화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은 미관말직 신선 셋, 요괴 화담, 도사 전우치, 다른 요괴들, 초랭이 그리고 표은대덕이다. 이 주요 인물들은 각기 다른 이야기를 던지고, 그 가운데 다른 역할을 수행한다. 이러한 다양한 등장인물들 여러 명이 아닌 내 안에 있는 나의 인격이라고 생각해 보는 건 어떨까? 이 인격들 중에는 본디 나의 것도 있겠지만, 이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취하게 된 인격도 있을 것이고, 또는 신념의 확장을 통해 얻어진 이로운 인격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인격을 모두 살펴보고 내 안에서 비워내고, 다시 내 것을 찾아 채워 넣는 과정을 해본다면, 전우치가 바다를 보며 자신에게 던졌던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 답은 지금 우리에게 꼭 필요한 답일 것이다.

 

     ⓛ ‘미관말직 신선 세 명’은 현대의 어지럽고 복잡한 세상을 어리석게 살아가고 있는 민중으로서의 나라고 볼 수 있다. 미관말직 신선 셋은 미관말직일지언정 하늘에서 온자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수와 실패 그리고 나약함을 보여준다. 이것은 우리가 아무리 많이 배우고, 좋은 직장에 다니더라도 우리에게는 아주 나약하고 보잘것없는 인격을 지니고 있고, 그 인격은 내 삶의 문제가 발생했을 때 가장 많이 두드러지게 된다. 영화 속 신선 셋이 1000일의 하루를 남겨놓고 문을 잘못 열어 발생한 문제에 허둥지둥 우왕좌왕하는 모습처럼 말이다.

 

     ② ‘요괴 화담’은 영원하지 않을 것들에 대한 끝없는 욕망을 보여준다. 화담은 자신이 누구인지 모를 때는 좌도방 당주이고, 의사이며, 임금의 지시에 따라 공적 임무를 수행한다. 그리고 화담은 저잣거리의 사람들이 모두 인정해 주는 실력과 덕망을 모두 겸비한 인물이다. 하지만, 그는 사실 화담이라는 가면을 쓴 요괴일 뿐이다. 그리고 그가 만파식적의 반쪽짜리에 마음이 빼앗기고, 자신이 요괴임을 알고 난 후 그가 한 대사 "이제 집이 너무 작구나"는 소유하는 삶을 사는 자들의 채울 수 없는 욕망을 여실히 보여준다. 화담과 같은 욕망은 우리의 마음속에 누구나 가지고 있다. 그 욕망을 잠시 족자에 가둬두었거나, 또는 피리를 얻기 위해 500년을 기다리고 있을 수 있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 욕망이 나를 집어삼키고 내가 없어진 욕망 덩어리가 되기 전에 우리는 지금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지 내가 진정 바라는 것이 끝없는 욕망인 건지 되짚어봐야 한다.

 

     ③ ‘전우치’는 겉으로 보기에 자신의 생각대로 철부지처럼 살아가며 도술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자로 보인다. 그러나 그의 내면에는 항상 최고의 도사 또는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의문을 품고 그것의 답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그가 되고자 하는 최고의 도사라는 것도 정말 최고의 도사가 되기 위함보다는 그가 생각하고 찾아낸 정체성이 거기까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사랑을 여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알게 되는 마음을 비운다는 것과 그리고 얻어지는 도력은 전우치가 타인을 배려하는 삶의 가치를 선택했을 때 하나의 과제를 성공했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최고의 도사가 되었음에도 전우치는 소년과 같은 순진함, 천진무구함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최고의 도사라는 과제가 전우치가 진정으로 바라는 자신의 정체성이 아니기 때문에 그에게는 계속해서 성장할 수 있음과 성장해야 함의 과제를 부여했다고 본다. 그래서 전우치는 내 안의 나를 찾아가는 구도자 같은 마음이고, 그 마음은 능동성을 바탕으로 한 독립과 자유 그리고 비판적 이성을 전제한다. 전우치가 궁에 들어가 임금과 대신들을 농락하고 한바탕 즐기는 모습은 광화문광장에서 촛불을 들고 권력과 사회문제를 비판하면서 함께 즐거이 어우러져 시위를 하는 우리의 모습과도 견주어 볼 수 있다.

 

     ④ ‘요괴 둘’은 조선시대에서는 이조참판과 그의 수하로, 현대사회에서는 의사와 병원 직원으로 둔갑하고 있다. 이 요괴들은 어쩌면 둔갑한 것이 아니라, 이조참판이고 의사인지는 않을까? 권력, 재물, 사회적 지위와 명성을 쫓아가는 자들 또는 내 안의 그러한 마음을 나타내는 것일지 모른다. 그리고 그런 마음은 그것들을 얻기 위해 항상 친절함 속에 사악함을 의로움 속에 대가를 감추고 있다. 지금 나는 무엇을 감추기 위해 어떤 가면을 쓰고 있는지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⑤ 전지적 초랭이 시점을 통해 인간이란 존재에 존귀함과 함께, 존재의 의미를 찾은 개는 인간 못지않게 행복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듯하다. 인간이 되기 위해 배신도 하지만, 결국 초랭이는 우치를 위해 몸은 던진다. 그리고 그는 그러한 자신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인간이거나 개이거나 또는 말이거나 상관없이 그 존재의 가치를 찾게 되었다. 지금 나의 모습이 또는 내가 이룬 것이 귀하지 않다고 느껴질지라도,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무엇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지가 나를 결정한다는 것을 초랭이를 통해 반추해 볼 수 있다.

 

     ⑥ ‘표은대덕’은 내 안 저 깊숙이 숨겨져 있는 진정한 나 자신이지 않을까? 요괴의 마성에 젖어 아직 자신이 누군지 모르는 표은대덕... 우리도 어쩌면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소비의 마성에 젖어 실재적인 존재로서의 내가 누구인지를 모르는 것은 아닐까? 아마도 영화에서 표은대덕이 자신이 누구인지를 끝까지 알지 못하는 것으로 봐서는 지금 우리 사회에서 소비의 마성을 벗어던지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님을 말하고 싶어 하는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 안에 진정한 내가 있음을 알고, 그것을 찾아나가는 노력을 끊임없이 해야 함에 대한 필연적 과제가 있음을 말해준다.

 

 

4. 인간다움에 대한 로망의 실현과 사회적 합의

 

  미관말직 신선 셋은 참으로 단순하게 묘사되었다. 신선임에도 그들은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을 여과시키지 않고 아주 투명하게 보여 준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이 옮겨 다니는 등장인물들을 살펴보면, 소유함의 자극에 이끌리지만, 결국 그 본질은 존재함에 있음을 알려준다. 그러나 그 마음 이동의 과정을 볼 때 신선들은 자신들이 찾고 있는 본질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

  사실 영화 <전우치>는 코믹, 판타지, 모험 등 재미요소가 많다. 이 영화를 이렇게까지 진지한 주제로 해석해보는 것이 의미가 있는가에 대한 고민을 했다. 그러나 막상 영화 나름의 시각으로 해석해 보았을 때 감독이 그러한 의도를 가졌던 가지지 않았던, 관객이 호응하는 아니, 감독의 말을 빌려 관객이 자신의 삶에 대해 위로받는 서사에는 본질이 있다는 것이다. 전우치에서는 불평등에 맞서는 영웅을 통해, 암살에서는 역사적으로 처단하지 못했던 일제의 잔재를 처단한다. 이러한 판타지는 극적 스토리 등 잘 짜인 구성을 바탕으로 관객에게 카타르시스를 선사함과 동시에 흥행이라는 선물을 안겨줬다. 그럼 우리에게 카타르시스를 선사하는 본질의 구성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지금 살아가고 있는 삶 그 자체가 행복하지 않고, 삶을 지속할수록 상처와 아픔이 쌓여가는 인간답지 못한 것에서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인간답지 못한 삶을 바꿔주는 최동훈표 영화의 서사는 우리를 위로해주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 모두는 이 각박한 사회에서 치열하게 경쟁하며 살아가고 있지만, 인간다움에 대한 로망은 언제 가슴속에 자리 잡고 있고, 어떤 때는 그 로망이 오히려 지금의 나와 비교되어 더욱 허무함을 안겨주는지 모른다. 그러나 지금까지 개인 스스로 인간다움을 찾아가는 것은 너무 힘들고 고달픈 선택일지 모르겠지만, 사회적 합의를 통해서 모두 함께 움직인다면 그것은 충분히 해결 가능한 과제라고 생각한다. 촛불 혁명에 힘입어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지 벌써 2년이 되어가고 있다. 정부는 사람중심의 경제, 함께하는 성장 등의 정책을 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도 잘 실현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 바로 우리 사회 수많은 이해당자사들 간의 사회적 합의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지금까지 함께 모였다면, 이 사회가 지속 가능할 수 있도록, 함께 모인 사람들을 마주하고 서로를 이해하는 용기가 필요한 시기이다. 최동훈 감독은 차기작으로 <도청>이라는 작품을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이번 영화를 통해서 우리는 또 어떤 위로를 받을 수 있을지 기대된다.

 


 

<참고문헌>

 

 

1. 기본자료

최동훈, <전우치>, 2009.

 

2. 단행본

신병주, 노대환. 『고전소설 속 역사여행』, 돌베개, 2005.

박철현. 『사회문제론 - 이론, 실태, 지구적 시각』, 박영사, 2010.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황문수 역, 문예출판사, 1976.  

에리히 프롬. 『소유냐 존재냐』, 차경아 역, 까치, 1996.  

강준만. 『대중문화의 겉과 속』, 인물과 사상사, 2013.

 

3. 학술저널 논문

이종호, 「고전소설<뎐우치젼>과 영화 <전우치>의 서사구조비교 연구, 『온지논총』 26, 2010.

김영학, 이용욱,동양 사상과 한국형 판타지 영화 <전우치>론<전우치> 론」, 『국어 문학』국어문학 53, 2012.

현승훈, 「한국형 슈퍼히어로 영화<전우치>에 나타난 변형된 인물이 욕망과 서사구조 연구 분석」, 『한국 컨텐트 학회』한국컨텐트학회 2013 추계종합학술대회추계 종합학술대회, 2013.

배상민, 「최동훈 천만 관객 영화의 잘 짜여진 이야기 구성」, 『한국콘텐츠학회논문지』 ‘18 Vol. 18 No.2, 2017.

이민호, 이효인,최동훈 영화의 사회반영성 바흐친의 카니발 이론을 중심으로」, 『한국콘텐츠학회논문지』 ‘13 Vol. 13 No.6, 2013